그러나 Doom엔 랜덤 인카운터가 없으며, 실시간으로 레벨의 이곳저곳을 별다른 리스크 없이 누비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E3M6의 레벨 디자인은 오히려 Wizardry보다는 Super Mario 64의 샌드박스 레벨이나, Super Mario World의 Forest of Illusion 월드(개별적인 스테이지가 아닌 전체 월드를 말하는 것이다)가 연상된다. Mt. Erebus 말고도 E3M2 Slough of Despair와 E3M7 Gate to Limbo(단 이 레벨은 E2의 레벨들과 샌드박스 레벨의 절충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레벨에서 중요한 것은 던전 탐색이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구역이 처음부터 접근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건, 바꿔 말하면 각 구역의 적들 또한 처음부터 온 맵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에피소드 2의 맵들은 언제나 통로와 문을 통해 다른 방들과 분절되어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다음 방이나 구역으로 진입하면 적들은 쫓아오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E3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넓은 오픈 필드 위에 각각의 독립적인 방들이 설치되어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오픈 필드 안의 적들은 플레이어가 어느 지점에 있든 간 쉽게 쫓아올 수 있으며, 쫓아오지 못 하는 경우에도 적어도 플레이어를 향해 투사체를 던질 수는 있다.


  즉 E1의 레벨들이 ‘슈팅’을 통해 각각의 구역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E3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슈팅뿐만 아니라 적들의 직접적인 이동을 통해서도 플레이어에게 끝없는 압박을 가한다. E1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Doom만의 가치에 집중한, 적어도 그 디자인 의도만큼은 뛰어난 레벨 디자인이다. 거기다 Mt. Erebus에선 오롯이 로켓 점프를 통해서만 진입 가능한 비밀 스테이지를 배치하여 Action을 통한 탐험과 문제 풀이를 구조적으로 요구한다. 여전히 이렇게 Action과 Adventure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미션은 Mt. Erebus 단 하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E1과는 달리 E3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완성도가 낮아 단순히 의도만 좋은 것에 그친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한 레벨 안을 돌아다니는 적들의 수가 너무나도 적다. 그래서 적들이 플레이어를 사방에서 포위한다든가, 플레이어의 게임 진행을 육탄 방어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E1의 레벨들은 적들의 수가 적더라도 플레이어가 언제나 비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다는 제약이, 슈팅을 통한 압박과 적들의 육탄 방어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굳이 방에서 방으로 이동할 필요 없이 오픈 필드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샌드박스 레벨에선 그러나 적들의 수가 적으면 슈팅을 통한 압박도 육탄 방어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샌드박스 레벨들은 가능성을 보이기만 했을 뿐이다. 슈팅뿐만 아니라 적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서도 통일성을 띄는 레벨 디자인은 분명 슈팅으로만 각각의 구역들에 통일성을 부여한 E1의 레벨 디자인보다도 더욱 진보한 철학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레벨의 완성도 자체가 E1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다. 여전히 맵 곳곳에 숨은 키 카드를 발견하고 퍼즐을 푸는 과정은 E2만큼이나 단순하며, 그렇다고 E1만한 다회차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3는 한 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액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탐색과 샌드박스 레벨들은 분명 제대로 디자인되기만 한다면 E1이나 E2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Doom에선 그것이 그저 가능성에 그치고야 말았으나, 시행착오의 과정 속에서 배운 것도 분명 많았을 것이다. 이미 Doom의 도구 체계는 완벽하다. 모든 무기가 제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갖추고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개성적이고 유용하다. 그렇기에 남은 과제는 그러한 도구들의 수준 높은 활용을 요구할 수 있는 레벨들을 갖추는 것이다. 이미 에피소드 1만으로도 Doom은 영원히 플레이될 게임이지만, 분명 그 이상의 가치를 노려볼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Doom을 플레이하며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E2와 E3의 모든 레벨을 디자인한 샌디 피터슨이 후속작에선 기량을 만개하는 데 성공했을까? 또 존 로메로는 E1의 슈팅을 통한 던전의 통일을 더욱 발전시켜서 더 나은 레벨들을 디자인했을까? 아니면 id의 모두가 첫 작품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후속작을 내놓고는 전작의 성공에 안주했을까? 물론 Doom도,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후속작도 발매된 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선, 우리 모두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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